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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 개성의 또래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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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Author
관리자
작성일/Date
2022-11-01 13:47
조회/Views
2992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부산시가 공동주최한 <청년 평화 에세이 공모전>에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양두리 부장이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2005년부터 시작된 한겨레 - 부산시 국제심포지엄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논의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학술행사 입니다. 2022 한겨레 - 부산시 국제 심포지엄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본 에세이 공모전은 "내가 OOO을 만난다면" 이라는 주제로 청년들이 생각하는 평화의 그림을 그려보도록 했습니다. 

우수상을 수상한 양두리 부장의 글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는 지난 2015년 개성에서 만난 북쪽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에세이 입니다. 아래에 글의 전문을 나눕니다.

*글의 저작권은 공모전을 주최한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있으며, 재단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진 선생, 잘 지냅니까.

우리가 만난 게 2015년 가을이었으니, 벌써 7년 전의 일인가요.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진행하는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사업의 중간 보고를 위해 개성에 방문했을 때였지요. 저는 남측 방문단의 인솔자, 진 선생은 북측 개성 안내원이었고요. 새삼 참 신기합니다. 7년 전에 고작 두 번 봤을 뿐인 사람을 계속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요. 진 선생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기억할까요? 내게는 그때 찍은 우리의 사진이 있어서 종종 꺼내어 볼 수라도 있는데, 진 선생에게는 사진이 없으니 아마 나의 생김새를 기억하기 어렵겠지요. ‘그때 남조선에서 왔던 사람 중 양씨 성을 가진 또래 여성이 있었지....’ 이런 희미한 존재감 정도가 남아 있으려나요?

진 선생에게 나의 첫인상은 어땠을까요? 나에게 진 선생은 가지런한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검은색 정장 자켓과 치마, 구두를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 양손은 앞으로 모아 잡은 채 다소곳하게 서 있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다른 참사들은 크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진 선생은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조용히 우리 곁에 있었지요. 그런 모습에 되려 말을 걸어보고 싶었답니다. 실은 그것도 제게는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활동가의 첫 방북인데다, 처음으로 북쪽 사람을 만난 것이었으니 긴장할 밖에요. 가기 전날, 선배들에게 ‘청바지를 입어도 되느냐’고 질문하고, 개성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는 너무 긴장해서 속이 쓰릴 정도였던 걸요.

하지만 그 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북에 가지 못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많은 것을 물어볼 걸 그랬어요. 후회막심입니다.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조금 어렸을 동무들의 생활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는데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그런 질문을 할, 그런 호기심을 가질 기회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네요. 겨우 내가 아는 거라고는, 진 선생이 개성에 살면서 동양화를 공부한다는 것뿐. 지금도 그림을 그리나요? 그림은 그리는 사람을 닮는다는데, 진 선생의 그림은 어떨까요. 아마 평생 상상 속에서나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겠지요.

개성 방북 첫째 날, 우리는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누었고,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서로 씨익- 웃고는 했습니다. 조심스러웠지만, 어쩐지 이상하게 편안했던 기억이 나요. 긴장 탓에 아침부터 쿡쿡 쑤시던 아랫배가 괜찮아진 건, 진 선생의 눈웃음 덕분일지도 모르겠네요. 두 번째 만난 날에는 그래도 한 번 봤다고 친해져서, 이동할 때 팔짱을 끼고 다녔지요. 제가 가져간 카메라로 함께 사진도 찍었고요. 만월대 앞 붉게 물든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커다란 나무 아래서 나를 향해 돌아보며 웃는 진 선생이 참 예뻤는데 말이에요. 그때 찍은 사진은 여전히 제 손전화 안에 저장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헤어져야 할 시간.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야 하는데, 자꾸만 고개가 진 선생이 탄 버스로 돌아갔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이 버스에 올라타면, 우리는 아마 살아있어도 영영 볼 수 없겠지.’ 이상했습니다. 울렁거리는 감정 자체도, 고작 두 번 본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요. 눈앞의 누군가를 99.9%의 확률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의 기분. 이제까지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죽음뿐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동안은 아무리 먼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도, 언젠가 볼 수 있을 거라 믿고 헤어졌는데. 고작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사는 진 선생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다니. 이 또한 이상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서, 손안에 쏙 들어가는 메모장에 부족한 솜씨로나마 낙서처럼 진 선생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개성에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팀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뭐라도 전해서, 그걸 통해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했거든요. 제 그림을 보고 아주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뭉클함과 애절함이 마음에 피어올랐습니다. 진 선생은 그 그림을 간직하고 싶다며 찢어줄 수 있냐고 했지만, 이런저런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결국 주고 오는 것을 깜빡했다며 미안해하는 동료의 말을 듣고 아주 아쉬웠습니다. 작은 종잇조각조차 주고받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 곧, 한반도가 처한 현실이겠지요.

진 선생, 저는 종종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만일 우리에게 시간이 있고 기회가 있어서, 여러 번 만나고 길게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조금씩 우정의 깊이를 쌓아 나갔을 수도 있고, 반대로 대화가 길어질수록 벌어지는 간극에 조금씩 멀어지며 결국 서로 보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같은 나라, 같은 동네,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와도 싸우고 틀어지는 걸요.

잠깐만 생각해봐도 우리는 다른 점이 참 많습니다. 사는 곳도, 체제도, 상황도, 관심사도 모두 다르지요. 하지만 비슷한 점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우선 사는 곳의 기후도, 언어도, 나이대도 비슷합니다. 성별도 같고요. 남쪽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신은 하이힐 때문에 발 아파하고, 피부 트러블에 대해 고민하던 모습은 내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랑 똑같았지요. 이런 상상을 할수록 먹먹해지는 것은, 우리는 싸울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일 겁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만약 진 선생을 다시 만난다면, 나는 정치나 역사, 체제와 가치관 같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지난번에 묻지 못한 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일상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어떤 일이 재미있었는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이 갔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서울의 날씨는 어땠는지, 어떤 일 때문에 속상했고, 어떤 일 때문에 행복했는지. 그렇게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보통 날을 알고 싶습니다.

진 선생과 나는 북에서나 남에서나 참 작은 존재들이지요. 김정은 위원장과 윤석열 대통령이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들의 손짓과 동작, 말투와 표정, 작은 미간의 찌푸림이나 입꼬리의 오르내림 등. 그들과 그를 둘러싼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전 세계가 주목할 겁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만남은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만남이겠지요. 우리가 만난다고 해서 어떤 대단한 역사가 쓰일 리 만무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철조망이 걷히는 일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큰 사람들이 큰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딜 때, 그 보폭만큼 생기는 빈 공간을 촘촘하게 채워주는 건 작은 사람들의 작은 걸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만남이, 우리 같은 작은 사람들이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가, 주고받는 표정이, 오가는 온기가 바로 작지만 단단한 씨앗이 될 겁니다. 진 선생을 통해 알게 된, ‘살아 있어도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오묘한 감정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바뀌어 제 활동에 불씨로 남은 것처럼 말이지요.

진 선생.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진 선생’ 말고, ‘송희야’ 하고 불러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양 선생’ 말고 ‘두리야’ 하고 불러 주면 좋겠습니다. 남쪽에서는 친구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거든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언제 어느 때나 건강하길 바랍니다.

추신. 추측하기로 내가 나이가 더 많을 테니, 사실 ‘두리 언니’라고 불러야 합니다만.... ‘송희’는 기꺼이 봐주겠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청년 평화에세이 공모전의 심사평과 당선작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클릭) 당선작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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