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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기타] 한걸음부터 모은 민족의 힘, 우리의 미래 다시 세운다

작성자/Author
관리자
작성일/Date
2017-03-22 14:11
조회/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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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 98 보고
한걸음부터 모은 민족의 힘, 우리의 미래 다시 세운다
신동호/시인

민족의 위기 극복과 남북어린이돕기 4천리 국토도보순례 행진 "98이 장장 37일간의 전국일주 대장정을 무사히 마쳤다. 굶어 죽어가는 북한의 어린이들과 IMF 경제 위기로 인한 국내 결식 아동들을 돕자는 취지로 시작된 이 행사는 전국 완주자 56명을 비롯, 1천여명의 지원자가 나서 민족의 위기를 힘찬 발걸음으로 극복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비록 수해로 인해 많은 양의 모금이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가는 곳마다 행진단은 수해복구에 적극 나서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 어린이들을 돕자는 호소로 열띤 환영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힘들었던 출발

8월 1일 파고다 공원을 출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들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남들보다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든지, 아니면 생활의 무료함에서 벗어나 무언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들 중 누구 하나도 정말 우리들이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4천리라는 머나먼 길, 그 길을 오로지 자신의 다리에만 기대어 걸을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번 행진은 너무나 고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하루 평균 45킬로를 걷는 37일간의 장정, 그것은 첫날부터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광주 마석고등학교의 차가운 마루바닥에서 밤새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들리고 피부에 뿌려대는 스프레이 냄새가 진동했다. 이튿날에는 발목이나 무릎이 아파 벌써부터 절뚝거리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춘천을 거쳐 홍천으로 가는 강원도의 높은 고개를 넘으면서 우리들 중 어느 한 곳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허벅지가 쓸리거나 발에 물집이 잡히고 부르트는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폭우를 뚫고, 고난을 넘어

그런 와중에 출발할 대 130명이던 행진단의 숫자가 자꾸만 줄어갔다. 어떤 이들은 말도 없이 배낭을 매고 컴컴한 교문을 빠져나갔다.
곁에 있어야 할 동료가 보이지 않을 때, 문득문득 편한 잠자리가 유혹할 때는 육체적 고통보다 견디기 힘들었다고 어떤 친구는 실토했다. 더욱이 출발 때부터 시작된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면서 행진 속도를 늦추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전해오는 홍수와 죽음의 뉴스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만들었다. 거리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는 "지금 수재민을 도와야지 무슨 북한 어린이 돕기냐?"는 질책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빗줄기를 더욱 아프게 맞으며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내리는 비는 우비 안으로 파고들어 속살까지 적시곤 했다.
비와 더불어 강원도를 지나 무섭게 불어난 남한강을 따라 내려갔다. 단양을 거쳐 대관령보다 높다는 저수재를 넘자 경상북도의 산야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걷고 있는가? 하지만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우리들이 걷는 의미를 되새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주최측의 설명과 토론 기회를 통해 축산 농가의 어려움과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최근 남한에도 결식 아동들이 부쩍 늘어가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길을 걸으며 우리들 스스로 겪는 고통 속에서 아픈 현실을 깨닫는 것이었다.
행진을 마치던 9월 6일 여의도 행사에서 우리들의 동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석영 씨(33세, 농아)가 수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호소했던 글은 그 때의 우리 심정을 잘 나타내 주었다.
이재홍 씨(25세)는 출발하던 날부터 인상을 썼던 사람이다. 누가 아는 척을 해도 짜증스러운 얼굴로 대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 때는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첫 날부터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부르트는 바람에 무척 애를 먹었던 것이다. 출발하던 날 아침 고이 준비해 둔 운동화를 아버지가 신고 나간 바람에 할 수 없이 구둣발로 합류했던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동료들은 십시일반 그가 새 운동화를 마련하는데 보탬을 주었고, 이 친구는 그 때부터 물통을 세 개나 지고 다니며 갈증난 동료들의 목을 축여 주었다. 또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우리는 그를 "북청 물장수"라 물렀다.
최호식 씨(24세, 대학생)는 행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저녁 머리를 밀고 나타났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수줍은 얼굴로 동료들 앞에 나타난 그는 "그냥"이라는 말로 삭발의 이유를 말했다. 우리도 그냥 웃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행진. 그것은 어쩌면 가장 평범했던 한 개인을 깨어나게 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130명이 출발하여 여의도에 도착할 때 4천리를 온전히 걸은 사람은 56명에 불과했지만 행진단의 앞에는 언제나 묵묵히 어린 우리들의 어려움을 감싸주시던 김유영 어르신(65세)이 계셨고 제주도에서 참가한 김보경 씨를 비롯한 15명의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앞장 서 걸었다.

온 국민이 함께 한 행진

행진이 거듭될수록 우리들만의 발걸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성과 예천을 지날 때 한아름 사과를 안겨 주시던 주민들, 부산시민들과 함께 한 8·15행사, 비를 맞으며 마중 나온 진주 시민들, 행진단의 대국민 호소문을 들으며 목포의 시민들과 함께 흘렸던 눈물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인천 지역 예술인 공연에서 할머니들이 신명난 부채춤을 출 때는 그간 쌓였던 피로들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각지를 지날 때마다 뙤약볕을 마다 않고 함께 걸어주신 수많은 국민들(연인원 3만여명)이 큰 힘을 주었고, 우리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렇게 임진각에 도착한 우리들은 더 나아갈 수 없게 가로막는 철조망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통일염원을 새긴 색띠를 묶어 놓았다. 해외동포로서 캐나다 횡단 7천 킬로를 걸으며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을 모았던 원재엽 씨(46세)는 행진단 대장으로서 이번 4천리 행진이 하나의 사고 없이 마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북녘 땅까지 행진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영부인 이희호 여사 행진단 격려

9월 6일 여의도 환영식장에서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뜻을 함께 하는 4킬로미터 도보행진을 한 뒤 우리들을 반겼다. 고건 서울특별시장, 김성훈 농림부장관,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환영사를 했다.
특히 영부인 이희호 여사께서 직접 참가하여 완주자들에게 메달을 걸어주고 격려사를 하였다.
"행진이 시작된 후 나는 제일 나이 어린 송형진(17세, 양정고 1학년)군이 끝까지 걸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 민족이 6·25 이후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송 군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완주한 것을 보니 우리 민족의 저력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머지 않아 이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의 시대를 맞이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수재와 배고픔 속에서 아득하게 보낸 지난 여름날, 뜨거운 뙤약볕과 폭우를 견디고 끝내는 자신을 이겨내고 민족의 위기 앞에 당당하게 극복의 의지를 보여준 행진단 전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뿐만 아니라 행진단의 식사와 잠자리를 챙겨주는 등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자원 봉사자들에게도. 그리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진행자들과 한국복지재단, 중앙일보와 KBS의 기자들, 이 행사를 기획했던 한국예술기획연구소의 여러분들도 이 행진을 위해 너무 수고가 많은 분들이었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어려움들이 남아 있고, 때늦은 태풍은 국토의 남단을 또 한차례 수마로 멍들게 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들은 더욱 푸른 행진을 계속해야 하리라 생각하며 작은 보고서를 덮는다.

(위 글은 월드컵 문화시민 가을호에 신동호 시인이 기고한 글입니다)





등록일 : 2002-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