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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정책] 대북한 인도적 지원을 위한 한일 민간협력의 방향

작성자/Author
관리자
작성일/Date
2017-03-2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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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한 인도적 지원을 위한 한일 민간협력의 방향

서경석 목사(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

북한 식량난의 실상
지난 3년간 식량난으로 얼마나 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북한에 아사자에 대한 공식통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평양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연변지역을 통해 수집되는 정보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 상주하고 있는 WFP 관계자들은 아사자의 수를 기껏해야 수십만 명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NGO의 하나인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는 지난 1년 반 동안 중국의 두만강 국경지역에서 식량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오는 탈북자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조사작업을 행하면서 지난 3년간 약 3백5십만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의 보고는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정부나 한국언론계를 포함하여 국제사회는 이를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탈북자가 증언하는 평균 사망률(28.7%)을 지배층과 농민을 제외한 일반주민 수에 곱한 단순계산만으로 아사자의 수를 추정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북한의 각 지역간 사망률의 편차가 있고 훨씬 더 어려운 지역에서 더 많은 탈북자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어 이제 와서는 미국무성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점차 3백만명 가량이 죽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2백만 내지 3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는 점을 이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숫자만 가지고도 북한의 기아사태는 지난 수년간에 있어서 세계 최대의 비극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해 북한의 식량수확은 약 350만 톤으로 전년도에 비해 30% 가량 증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확량은 주민들이 최소한의 영양섭취로 8개월간 살 수 있는 양에 불과하며 여전히 135만 톤의 알곡이 모자라고 이중 105만 톤은 원조로 지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제사회의 대북식량지원에 대한 열기는 계속 낮아지고 있으며 대북지원의 상당한 부분을 감당하였던 중국의 흉작으로 금년도의 북한의 식량사정은 예년에 비해 별로 나아지지 않을 전망이다. 지금 북한의 식량난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철저한 사회통제에 의해 빈곤의 균등화가 이루어져 있는 채로 식량난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러한 사실이 국제사회에 공개되어 있지도 않아 국제지원의 증대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장기화된 식량난으로 인한 폐해가 단기간 내에 시정되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는데 있다. 작년 10월 WFP 등 3개 국제기구가 공동으로 실시한 어린이 영양상태 조사결과 어린이의 62%가 발육부진 또는 만성적 영양결핍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북의 식량난에 대한 한국 민간운동의 대응
한국에서 민간모금운동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은 1997년 3월 이후이다. 그 전의 북한동포돕기운동은 범국민운동적 성격을 띠지 못했다. 한국에서 이미 몇 년 전부터 종교계 일각에서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전개되어 왔었으나 1996년 북한 식량난의 심각성이 알려지면서 1996년 6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창립되는 등 모금운동이 본격화되었으나 1996년 가을에 있은 강릉 앞바다 잠수정 침투사건으로 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나 북의 식량난의 참상이 계속 알려지게 되자 97년 3월부터 북한동포돕기운동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수백 개의 단체들이 북한동포돕기운동에 가세하였으며 북미주, 호주, 유럽, 러시아, 중국, 남미 등 해외교포사회에서 빠짐없이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실로 3.1운동이래 최대의 민족운동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금운동은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민간모금운동을 완전히 막지는 않았지만 북녘동포돕기운동이 안보의식의 해이로 연결되는 것을 우려하고, 북한을 압박하여 4자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생각에서 북녘동포돕기운동에 대해 계속적인 규제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인도적 지원은 전부 한국적십자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하여 모금운동의 자발성을 죽이고, 언론과 기업의 모금운동 참여를 금하여 푼돈만 모으게 하고, 길거리에서의 모금운동확산을 금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금액의 2% 이상을 행정비에 쓰지 못하도록 규제해 놓은 기부금품모금규제법을 가지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운동을 조사하고 마치 혐의가 있는 듯이 언론에 흘림으로써 민간모금운동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기회 있을 때마다 지원식량의 군량미 전용의혹과 김정일 정권의 독재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황장엽 씨의 기자회견을 통해 전쟁준비설을 유포하고 나아가 97년 중반에는 올해의 대규모 기아발생의 우려는 해소된 것으로 본다는 평가까지 내어놓아 북녘동포돕기운동의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한의 행위도 모금운동에 큰 장애가 되었다. 강릉 잠수함침투사건, 서해안에서의 발포사건, 군사분계선에서의 시위, 전쟁 불사발언 등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북한은 바로 우리의 적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모금운동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뿐만 아니라 북한체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큰 장애였다. 엄청난 사람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을 엄청난 돈을 들여 보수하는 것은 한국민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외에 군량미 전용의혹, 한국정부와의 대화거부, 심각한 인권상황, 개혁개방에 대한 거부 등도 한국민이 느끼는 실망의 중요부분들이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한국사회는 참혹한 식량난에 대한 동정과 북한체제에 대한 거부반응이라는 대립적인 관점의 사이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격렬한 내부 논쟁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격렬한 대화와 토론의 과정 속에서 점차 아무리 적이지만 동시에 같은 민족이기도 한 북한주민의 죽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국민여론이 모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가톨릭, 기독교, 불교 등 보수적인 종교계 인사들의 노력이 크게 주효했다. 그리하여 이 캠페인 과정에서 한국민간모금운동의 입장도 크게 몇 가지 방향으로 모아지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첫번째 인식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동포애에 기초한 인도적 지원활동이 군비를 증강하고 안보태세를 강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일단 발발하기만 하면 누가 최후의 승자인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북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화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화해정책밖에 없다. 남과 북은 서로 적과 동포라는 이중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동포애의 발휘를 통해 북이 남을 적보다는 동포로 더욱 인식하도록 만드는 일만이 전쟁을 방지하는 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은 남과 북이 오랜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두번째로 민간모금운동은 북의 김정일 정권을 지지하는 운동도 아니고 반대로 북의 붕괴를 원하는 운동도 아닌 순수한 인도적 지원활동이라는 점이다. 만일 이 운동이 특정의 이념을 갖게 되면 남북 어느 한쪽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경우 운동의 존립이 불가능해진다. 이 운동은 종종 한국사회에서 '결과적으로 김정일 정권을 돕는 운동이 아닌가?'하는 눈총을 받는다. 반면에 북으로부터도 '북한주민의 마음을 남쪽으로 쏠리게 하여 결국은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는 운동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용공운동도 반공운동도 아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우리는 북의 붕괴를 원치 않는다. 더구나 북의 붕괴가 가져올 엄청난 재난을 남한이 감당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북이 미증유의 식량난을 하루빨리 극복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리고 북한동포돕기가 활성화되어 식량뿐만 아니라 농업, 의약품, 에너지, 산업지원 등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만큼 북의 형편도 나아지고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동북아의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볼 따름이다.
세번째 인식은 한국의 민간모금운동은 대북지원곡물의 분배확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인도적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몇몇 외국 NGO들이 분배의 투명성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한 바 있다. 물론 투명성 보장은 반드시 되어야 하고 우리는 이를 계속 북에 촉구하여야 한다. 지원식량이 군량미로 쓰인다는 보도가 나오게 되면 모금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식량이 부족하다고 해서 군대를 굶기는 나라는 없다. 게다가 북의 농업생산량은 군량미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양이기 때문에 자체생산 식량을 군량미로 사용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지원식량의 일부가 군량미로 전용된다면 그 양만큼 자체생산 식량이 민간에게 돌아가게 된다.

군량미 전용을 이유로 식량지원을 중단하면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은 바로 북한주민일 뿐이다.
네번째 인식은 북의 김정일 체제와 북한주민을 분리시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체제와 주민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민간모금운동이 김정일 체제의 문제점을 이유로 북한주민돕기를 중단한다면 그 결과 북의 주민들만 희생되고 만다는 점이다. 지난 3년간 3백만명이 희생되었다면 근본책임은 북한 정부당국에게 있겠지만 책임의 일부는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북한당국과 북한주민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은 데에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지난 1997년의 민간모금운동은 국제적십자사를 통한 공식통로로만 181억원(2천49만달러)이 지원되었는데 이는 96년의 12억원에 비하면 15배나 증가된 규모이다. 더구나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이나 중국국적의 조선인을 통한 지원을 포함하면 그 규모는 최소한 20%는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이 모금이 정부의 규제와 탄압 속에서 푼돈만을 모아 조성한 금액임을 감안해보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앞장선 한겨레신문의 결단이 있었기에 이 모금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간모금운동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단지 모금한 액수의 크기로 평가될 수 없다. 그 동안 북한을 오로지 적으로만 인식해 오던 우리 국민이 북한주민을 적보다는 동포로 인식하는 변화가 모금운동의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북인식에 있어서도 북을 옥죄고 밀어붙이는 '바람'론에서 상대방을 동포애로 녹이고 감동시키는 '햇볕'론으로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햇볕'정책이 비로소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되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정책변화는 1997년의 북한동포돕기운동에 확산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민간모금운동의 향후 방향
1998년 2월에 들어선 김대중 정부가 대북정책을 햇볕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선언하며, ① 북한의 무력도발 불용, ② 흡수통일배제, ③ 화해협력의 적극추진을 대북정책의 3대원칙으로 설정함으로써 한국의 민간모금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북에 의한 간헐적인 도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의연하게 화해정책을 일관되게 견지하였으며 현대그룹에 의한 금강산 관광도 실현되어 남북관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민간모금운동에 대한 일체의 규제도 폐지하여 언론과 기업의 모금운동 참여금지가 해제되고 최근에는 대북지원에 있어 한국적십자사로 창구를 단일화해 온 제도까지도 폐지하였다. 민간단체 대표들의 북한방문도 자유롭게 허용하며 지난 1998년에 많은 민간모금단체 대표들이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IMF 경제위기로 인해 민간모금운동의 상황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언론의 관심은 실업자대책으로 집중되고 종교계 등 민간모금운동도 주된 사업을 국내의 실업문제로 돌리게 됨에 따라 북녘동포를 위한 모금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로 인해 민간모금운동은 대중적인 확산의 길이 막히게 되고 북의 식량난 보도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 점차 시들해져서 민간모금은 크게 줄어들었다. 1998년 4월 25일을 기해 이루어진 국제금식의 날 행사도 국제적으로는 37개 국가 107개 도시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국내모금에 대한 기여도는 옥수수 6천톤 분량에 불과하였다.
다만 1998년 민간모금액이 2천59만달러(272억원)로 통계가 잡힌 이유는 98년 4월 한국적십자사의 3차 지원(옥수수 5만4천톤)에 소요된 금액이 작년 IMF 위기 이전에 모금된 금액으로 대부분 충당되었고 현대그룹이 옥수수 1만6천톤, 소, 자동차 지원 등 대규모의 지원을 한 것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98년의 대북 모금수준은 모금운동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전년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민간 모금능력의 저하로 인한 부족을 메우는 방안은 정부차원의 지원을 확대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민간단체들은 꾸준하게 정부차원의 지원 확대를 촉구해 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역시 상호주의를 앞세워 이산가족 만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비료지원을 포함한 정부예산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결과 햇볕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김대중 정부 하의 1998년도 정부지원은 1천1백만달러(154억원)로 김영삼 정부의 1997년도 정부지원규모인 2천737만달러(246억원)의 절반 이하로 줄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김영삼 정부 당시의 절반 이하에 불과한 대북지원만을 행해서는 햇볕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한해에 투입하는 실업기금이 10조원에 달하고 있는데 이 금액의 1%만이라도 북한주민의 생존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정부 간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러한 대규모 지원이 불가능하다면 캐나다 정부와 같이 매칭펀드(matching fund)제도를 도입하여서라도 약화된 민간의 모금능력을 보강하여야 한다(캐나다는 민간모금 액수의 4배를 정부예산에서 보조해주고 있다).
IMF 위기 하에서의 한국민간모금운동의 역량은 북의 식량난을 해소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민간모금운동은 단순한 모금규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997년의 모금운동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가능케 하였던 것처럼 민간모금운동은 보다 근본적으로 국민의 의식을 바꾸는 운동이며 나아가 우리민족에게는 통일을 준비하는 나눔운동이며 동시에 민족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간모금운동은 앞으로도 의연하게 북한동포돕기운동을 계속해 갈 것이다. 다만 이제는 과거와 같은 방식의 식량지원으로는 모금이 힘들어졌기 때문에 모금방식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①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농업지원의 방향으로 모금이 전환되고, ② 군단위로 농업협력, 계약재배, 의약품지원, 식량지원 등 종합지원을 하는 방식이 모색되고, ③ 의약품 지원활동이 활성화되고, ④ 탁아소, 국수공장, ○○도시 살리기운동 등 소규모의 특정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방식이 활발해지고, ⑤ 옷보내기, 책보내기, 컴퓨터보내기, 양잠지원사업, 분유보내기, 젖염소 보내기운동 등 지원품목의 다양화가 이루어지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북의 상황은 단지 인도적 지원활동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의 민간운동은 인도적 지원활동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실현을 위한 노력으로 그 관심을 넓혀야 한다. 한미일 관계 일괄타결 촉구, 북한의 탈북자 인권문제,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해제문제, 북일 관계개선문제, 남북간 문화교류 등 다양한 과제들이 우리들 앞에 산적해 있다.

대북 인도적 지원을 위한 한일시민협력의 방향
대북 인도적 지원문제를 주제로 한일 NGO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의의는 이번 회의가 북한의 식량난 문제를 단지 한민족 내부의 문제 혹은 전 세계의 기아문제의 한 사례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이 문제를 한일간의 문제, 나아가서는 동북아의 공동의 문제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 모임이 앞으로 한중일대(韓中日臺) 등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시민협력을 증진시키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둘째 의의는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한 일본의 역할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일본의 여론이 극도로 냉담한 시점에서 이번 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서울주재 일본기자가 '이번 NGO회의를 개최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번 회의는 일본 NGO들의 양심적인 결단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번 회의를 주최한 일본의 시민단체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이에 우리들은 이번 한일 NGO회의에 임하여 일본인들 특히 일본의 시민단체들에게 몇 가지 요청을 하고자 한다.
첫째로 북한의 기아문제 해결을 위한 인도적 지원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해 주기를 부탁하고자 한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일본인 납치사건, 그리고 작년의 대포동/인공위성 발사사건으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문제에 대해 매우 냉담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식량난보다 체제유지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북한당국의 행태에 대해서도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미 우리한국인들도 이와 유사한 충격을 여러 차례 겪었기 때문에 일본인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에게 북한은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경험을 겪은 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식량과 의약품이 없어 일년에 1백만명의 주민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책임을 단지 김정일 정권의 실정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며 그들의 죽음을 방치한 책임이 우리들 한국인에게도 있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민족내부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면서 일본인들에게 한국이 IMF의 위기에서 벗어나 모금능력을 회복하는 기간 동안만이라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줄 것을 호소하고자 한다. 그들의 죽음을 방치하고 있는 잘못은 일차적으로 우리 한민족에게 추궁되어야 하겠지만 인근에 위치한 일본도 이 추궁에서 완전히 제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일본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 가능성 등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문제와 식량지원을 연계시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북한주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일은 얼마든지 정치나 안보문제와 분리해서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유야 여하튼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바로 옆 나라에서 일년에 1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일본이 이를 사실상 외면하고 있다면 이것은 동시에 일본의 문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문제는 인도주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실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일본의 안보에도 큰 위협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의 가능성을 줄이고 구원에 얽힌 동북아지역의 상호화해를 실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국민의 對北 인도적 지원이 남북한의 화해 실현을 위한 절호의 기회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대북 인도적 지원은 일본과 북한 사이의 선린관계 회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일본정부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대북 인도적 지원에 나서도록 촉구해 줄 것을 요망하고자 한다. 그리고 북한이 매우 독특한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는 점을 감안하여 일본정부가 인도적 지원문제를 북한이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와 연계시켜 결과적으로 인도적 지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호소하고자 한다. 북한주민의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정부는 북한의 식량난을 해소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미국이 북한의 식량난 해소를 위해 하고 있는 역할 정도는 일본정부도 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북한의 식량난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등 동북아의 평화실현을 위해 일본과 한국의 NGO가 지속적으로 공동협력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금 북한의 식량난 문제는 동북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만큼 이 문제를 위해 한일중대(韓日中臺)의 시민사회가 반드시 공동협력하여야 한다. 북한의 식량난문제는 단지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산림, 에너지, 환경파괴와 연결되는 동북아의 환경문제이기도 하며 동북아의 평화정착과 안보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중국의 경우 난민을 유발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시민운동은 양국의 정부와 기업이 인류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공동으로 협력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양국의 시민운동이 서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만큼 상호간의 경험교환과 공동협력은 양국의 시민운동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일본과 한국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국이며 양국은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계기로 한일간의 과거사에 종지부를 찍고 미래를 향한 공동협력을 다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양국의 시민운동은 동북아의 주요 과제를 다루는 일에서부터 공동협력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시민운동의 최대 관심사의 하나인 북한의 식량난문제를 일본의 시민운동이 첫 번째 협력과제로 삼은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 2002년의 월드컵 공동개최가 양국민간의 공고한 선린우호관계를 상징하게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등록일 : 2002-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