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연합뉴스] 강영식 사무총장 "남북 민간교류 자율성 더 넓혀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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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Date
2019-03-0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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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식 사무총장 "남북 민간교류 자율성 더 넓혀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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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지원 아직도 '바닥'…중앙정부가 남북관계 주도한 탓"

"중앙·지자체·민간단체, 역할 분담하고 강점 살려나가야"

 

강영식 사무총장의 인터뷰 기사가 연합뉴스에 실렸습니다. 강 사무총장은 남북 당국이 먼저 합의를 하고나서 민간교류를 진행하는 '선관후민(先官後民)' 방침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래는 일문일답입니다.

 

▲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됐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여러 분야에서 남북교류가 활발해졌을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다르다. 대북지원은 아직도 바닥이다. 최악은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6년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도다. 이 2년 동안 민간단체가 대북지원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북녘땅을 전혀 밟지 못했다. 민간의 대북지원 액수 면에서 보더라도 작년과 올해는 이명박 정부 초기 때만도 못하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물자지원 현황을 보자.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지원액은 해마다 70억~80억 원이었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에는 무려 105억5천여만 원에 달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 첫해인 2017년에는 고작 3억9천여만 원이다. 작년에도 10억 원을 웃돌았을 뿐이다.

선관후민이라는 정부의 대북 방침 탓이다. 남북 당국이 먼저 합의를 한 뒤 민간교류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대북제재의 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의도는 이해하지만, 중앙정부가 남북관계를 지나치게 주도해나간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도 심한 편이다.
-- 민간단체·지자체의 남북교류를 활성화하려면.

▲ 자율성을 존중해줘야 한다. 교류협력사업의 핵심은 지속가능성이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북한 주민의 신뢰를 쌓으려면 오랜 세월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남북교류의 세 주체인 중앙·지방정부와 민간단체는 각기 나름대로 특성과 강점이 있다. 이에 따라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간단체의 강점은 대북 교섭력과 독자성이다. 이를 살려 나가려면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농업지원사업의 경우 시범농장 조성을 위한 1년 계획서를 정부 당국에 제출하면 사업 전체에 대해 승인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사업 계획 전체를 승인받았어도 단계별 사업을 할 때마다 또다시 승인을 받아야 한다. 세부계획별로 승인을 받는데 또 20~30일씩 걸린다.

지자체는 아예 남북교류 관련법에서 빠져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만 해도 남북교류협력법에 광역지자체가 교류·협력의 주체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광역지자체가 제외됐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 남북교류 통제는 북한도 마찬가지 아닌가.

▲ 북한도 바뀌어야 한다. 북한의 대남사업은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라는 창구로 단일화되어 있다. 조선노동당의 외곽단체다. 민화협에 3개의 핵심 부서가 있다. 지자체와 민간단체의 교류를 담당하는 부서는 협력국, 언론이나 학술단체 등은 사회문화국이다. 통일과 관련된 남북공동 행사는 '사무소'라 불리는 민화협 산하의 별도 조직에서 담당한다. 교류를 활성화하려면 민화협도 남북의 단체와 기구끼리 직접 접촉할 수 있도록 창구를 넓혀줘야 한다.
-- 유엔의 대북제재는 어떤가.

▲ 대북제재가 매우 촘촘하다. 인도주의적 지원은 쉽게 제재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외 사항으로 인정받으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미국 등 선진국의 민간단체는 제재 면제를 받기 위해 아예 많은 돈을 들여 변호사를 고용한다. 그만큼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시범농장이나 묘목장 조성을 위한 비닐하우스나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주사기, 해충 퇴치를 위한 분무기 등도 쉽게 보내지 못한다. 비닐하우스 속 파이프, 주사기의 바늘, 분무기의 일부 부품이 제재품목인 철이기 때문이다. 제재 면제를 받으려면 길게는 10개월이 걸릴 때도 있다.

남한의 민간단체는 인도주의 차원의 지원 품목을 보낼 때도 정부와 유엔 두 곳의 승인을 일일이 받아야 한다. 제재 면제를 위한 모든 책임과 서류 작성은 민간단체가 도맡아 한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정부는 중간에서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서류를 유엔에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 정부가 승인한 사항이면 유엔에서도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 도움을 줘야 한다.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결성된 계기는.

▲ 90년 중·후반 북한이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빠졌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기간이다. 적게는 80만 명, 많게는 3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풍문만 무성했다. 당시 남북관계는 극도로 경색됐고 군사적 긴장은 높아만 갔다. '빠르면 3주, 늦으면 3달, 늦어도 3년에는 북한이 망한다'는 의미의 3-3-3이란 말이 나돌 정도인데도 남한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북한은 급기야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때맞춰 남한의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이념이 다르다고 같은 동포가 굶어 죽는데 방관하면 되겠는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범시민운동에 나섰다. 경실련의 주도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강원룡 목사·서영훈 선생,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스님 등 네분을 대표로 모시고 96년 6월에 북한 돕기 운동에 나섰다. 이 범시민운동이 이름 그대로 단체의 명칭으로 정착됐다. 천주교·기독교·불교 등 6대 종단과 경실련, 흥사단, 성균관, YMCA·YWCA 등 주요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국민운동조직체로 발전한 것이다.
-- 유엔으로부터 '특별협의지위 NGO' 자격을 받았다.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대북지원과 민족화해를 표방한 최초의 민간운동이자 조직체다. 인도적 대북지원과 교류사업을 통해 남북 간의 반목과 대립을 깨고 한반도의 평화정착, 민족의 화해와 공존을 이루어가자는 것이다. 우리 단체가 내세우는 비전도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정의롭고 건강한 한반도평화공동체'다. 이런 비전과 활동이 인정을 받아 2000년에 유엔 경제사회이사회(UN ECOSOC)로부터 '특별협의지위 NGO(비정부기구)' 자격을 부여받았다. 덕분에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발언권을 얻고 국제 NGO와 협력·연대를 꾀할 수 있게 됐다.
-- 그동안의 활동은.

▲ 단체 결성 초기 긴급구호에서 한 걸음 나아가 북한의 인도적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농업과 보건의료 분야의 개발·지원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농업 분야는 생산구조 변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협동농장을 대상으로 농법 개선과 농기계 지원사업을 추진해왔다. 보건의료 분야 역시 북한의 열악한 기초의약품 수급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의약품 생산시설 확장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9년에는 7개 보건의료단체(대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한국제약협회, 대한결핵협회)와 함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를 구성해서 북한의 보건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왔다.

대북지원사업은 이명박 정부 시절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린 2009년 4월부터 끊기기 시작했다. 이듬해 내려진 5·24조치 이후부터는 악화일로였다. 그런 상황이 박근혜 정부 때까지 이어지다 보니 남북교류협력의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됐다.

남북경색 국면으로 우리 단체의 대북지원은 중단된 기간이 많아 성과가 성공적이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민간차원에서 민족화해와 통일운동의 물꼬를 텄다는 점은 성공적이라는 게 내·외부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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