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가 서둘러 앞으로 나가면서 진실, 진정성 따위를 등 뒤에 흘릴 때 그것을 조용히 수습하는 문학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 사유에 나오는 말입니다. 김이정 작가의 ‘유령의 시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화자인 딸의 시선에서 본 아버지는 분단된 나라에서 유령과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2025년 3월 19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회의실에서는 제81회 평화나눔 정책포럼이 열렸습니다. 이번 정책포럼은 그러나 이전의 포럼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전까지 진행된 80번의 정책토론이 북한의 인도적 상황이나 남북관계를 주제로 주로 진행되었다면 이번 정책포럼은 소설 ‘유령의 시간’을 쓴 김이정 작가와 함께 하는 북 콘서트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번 정책포럼은 또 신한대학교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원장 남영호)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공동으로 주최했습니다.
김성경 평화나눔센터 소장의 사회로 시작된 포럼에서 김이정 작가는 ‘유령의 시간’을 두고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딸 지형의 성장기”라고 설명했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의 김 작가는 소설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70년대 중반 시민아파트에 살았는데, “이 근처였다”면서 이날 포럼이 열린 마포에 오랜만에 찾아온 감회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김 작가가 준비해 온 파워포인트 자료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라는 문구로 시작했습니다. 75년 8월 15일의 광복절 아침, 김 작가의 아버지(작중 김이섭)는 아이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자서전의 첫 페이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꼭 한 달하고 1주일 만에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아버지가 기록한 자서전은 원고지 22매. 김 작가(작중 지형)는 그 당시 느닷없이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저 미완의 원고를 자신이 쓰게 되지 않을까. 아니 꼭 쓰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웠다.”(282쪽) 아버지가 마무리하지 못한 그 22매의 자서전 초고가 3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이 된 것입니다.
김 작가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이상적인 사람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도 객관적인 거리두기가 너무 어려워서 책상 앞에 “미화하지 말자”라고 적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만은 양보할 수 없었는데, “그는 내게 인간은 사랑하고 신뢰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가르친 사람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김 작가의 설명이 끝난 후 질의 응답이 이어졌습니다. 소설의 내용이 비극적이지만 소설의 분위기는 매우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질문에 김 작가는 “어쩌면 그 부분이 이 소설의 한계이기도 할 텐데, 제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이 그랬다”면서 “실제 아버지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지만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으며 분단된 나라의 남쪽에서 자신의 사회주의 전력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했던 사람이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작가는 또 ‘독자들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었으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버지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 인간의 이야기이며, 남한 사회에서 사상범의 굴레를 짊어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도 하다”며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 아직 드러난 게 많지 않다. 분단의 시대, 이런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며 읽었으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북 콘서트라는,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정책포럼은 분단이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들을 한층 더 미세하게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 자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