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와 (사)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정기 공동 칼럼을 발표합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우리가 다시 하나 되려면
박문수(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
나는 북한학 연구자다. 6.25전쟁 전후 남한 지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연구하고 있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이 문제가 지금까지 우리 무의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깨달음이 있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연구해보니 나의 생각 이상으로 이 일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생각의 한 자락을 여러분과 나누려 한다.
학살의 영향
피해자 유족이 추정하는 피학살자 규모는 남한에서만 120여만 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보다 규모를 더 적게 보는데 그래도 50만 명 이상이다. 가해자는 적대 세력(인민군, 국내 좌익), 군인과 경찰, 미군, 민간인이었다. 가해자로는 군인과 경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피해자로는 보도연맹원이 가장 많았다. 가해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 규모를 고려할 때 이 일은 명백히 국가 폭력이었다.
6.25 전후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은 가장 먼저 유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유족들은 연좌제와 주변의 차가운 눈초리 탓에 반세기 이상 피해 사실을 숨겨야 했다. 자식들에게 말하지 못한 경우도 흔했다. 연좌제는 가난을 대물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냉가슴으로 살아야 했던 유족에게 국가는 그저 폭력 집단에 불과했다.
이 사건을 목격했던 주민에게도 학살은 큰 상처를 남겼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심약한 이들은 실성하거나 중병에 걸렸다. 일부는 자살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국가가 어느 날 가해자로 둔갑한 일이다. 이들도 침묵을 강요받았다. 더러는 강제로 끌려가 피해자 시신을 묻는 일을 해야 했다. 동네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던 지역에서는 서로 살기 위해 손가락 총질을 해야 했다. 친척, 형제도 믿을 수 없었다. 폭력의 근원인 국가에 대한 공포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거나 고자질 해야 했던 상처가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 트라우마가 반공 정권의 독재를 가능하게 했고 여전히 횡행하는 반북·반공 콤플렉스의 토양이 되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가해자에게도 이 일은 숨겨야 할 기억이 되었다. 더러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무공(武功)으로 속여 승승장구한 이도 있었다. 이들이 가진 살인의 기억은 월남전으로 군사 독재 시기에는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공격과 탄압으로 이어졌다. 이들 가운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는 아스팔트 보수가 되어 지금도 증오를 선동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다행히 이들 가운데 다수는 이를 부끄러운 일로 기억하고 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들은 전쟁이 없었다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어떤 이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더러는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가해자 피해자 모두에게 가장 강력했던 트라우마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미 큰 힘이었는데 한국인이 전쟁 중에 만난 힘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 힘에 대한 공포는 누군가에겐 동경으로 누군가에게는 증오로 남았다. 이 힘을 동경한 이들은 무조건 친미가 되어 지금까지도 자신과 나라의 운명을 맡기려 든다. 아마 이들은 이러한 태도의 근원이 힘에 대한 공포였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까지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도 사정이 비슷했다. 북한 지역에서도 많은 학살이 있었다. 북한은 학살도 학살이려니와 전쟁 직후 특히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북쪽에 행해진 미국의 융단 폭격에 대한 공포를 트라우마로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이 트라우마가 핵무기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해원(解冤)과 화해
남북 모두에서 이 시기에 일어난 학살의 기억을 정화하지 않고 민족이 다시 하나되는 일을 꿈꾸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 상태에서 서로 하나가 되자는 말은 통합(integration)이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통일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통일은 필연적으로 큰 폭력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때 과거의 트라우마가 잔혹한 폭력 행사의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흡수하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의 통일을 반대한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해온 바는 민의 힘이 강해지면 그만큼 국가 폭력도 견제하기 쉬워진다는 것이었다. 민주화가 중요한 이유다. 이렇게 민이 힘을 길러 안전한 사회를 만들 때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할 위험도 줄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 피해자들의 해원도 필요하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진심어린 애도, 불가피했던 경우에도 사과와 뉘우침이 있을 때 유족들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다. 진실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합당한 사과, 배상과 보상을 하는 것이 이 해원의 시작이다. 안타깝게도 이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이 나서서 왜곡과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다고 한다. 이래서야 어찌 화해가 이뤄지겠는가? 같은 편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다른 편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직 화해를 말할 단계가 아니라 보게 된다.
다시 하나가 되려면
남북 모두에서 우리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과 이후가 평화로우려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불편한 기억을 지워야 한다. 이 일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용서를 강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우리 안에 감춰진 이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치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진 1) 구 대전형무소 터 망루 정면 우측 / 구 대전형무소 터 ⓒ근현대사 아카이브
사진 2) 제주 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 제주 4.3평화공원 ⓒ근현대사 아카이브
* 단체 소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는 분단의 현장에 자리하고 있는 천주교의정부교구가 2015년 9월에 설립하였으며,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이웃 종교인들, 그리고 시민 단체들과 연대하면서 이 땅의 화해와 평화 정착 방안을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북한의 식량난이 가장 극심했던 1996년 6월,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6대 종단 및 시민사회 인사들이 함께하는 국민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인도적 대북지원과 남북교류협력사업,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정책사업, 시민참여활동, 국제연대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