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와 (사)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정기 공동 칼럼을 발표합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해방 80년의 남북관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최완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이사장)
2025년은 해방 80년, 분단 77년이 되는 해이다. 거의 한 세기가 가까워오는 세월동안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통일과 평화를 외쳐왔다. 오랫동안 통일은 남과 북 모두에서 국민을 동원하고 일체화시키는 정치적 대의명분이었다. 특히 북한은 ‘통일을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남과 북은 아직 통일과 평화는 고사하고 남북관계도 정상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분단 이후 여러 차례 대화와 협상, 교류협력사업도 했고 고위급 및 정상회담까지 몇 차례 개최했다. 그 결과로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 9.19공동성명, 2.13합의, 10.4선언, 4.27 공동선언, 9.19공동선언이 나왔다. 이러한 합의나 선언이 나올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리고 교류협력이 활성화되고 군사적 긴장이나 충돌도 현저하게 완화된다. 평화가 정착되는 듯하고 통일의 길까지 열릴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생긴다.
그러나 지난 77년의 남북관계사가 말해주듯 이러한 현상은 지속 내지 진전되지 못했다. 아주 사소한 국내외의 상황변화에도 대화와 교류협력은 중단되고 갈등과 충돌이 재연되곤 한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아예 기존의 남북관계를 규정해 왔던 패러다임이 거의 송두리째 바뀌는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평화를 우선시하면서 두 개 국가론에 경도되어 왔던 남한은 역으로 공세적 통일론을 내세우며 1국가 카드를 활용해 보려고 하는 반면, 하나의 조선론을 금과옥조로 삼아왔던 북한은 의외로 2개의 적대국가론을 들고 나왔다. 가히 남북관계의 인터레그넘(Interregunum), 즉 정형화된 질서의 궐위(闕位)시대가 도래 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2024년 두 국가론, 두 교전국 관계론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시종일관 ‘하나의 조선론’의 틀 속에서 통일문제와 대남정책, 남북관계를 다루어 왔다. 그들은 통일은 ‘분단된 1국가를 통일된 1국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심지어 유엔에 가입하면서도 유엔가입이 한반도에 두개 국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동안 북한이 하나의 조선론을 신앙처럼 받들어 온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이야말로 통일추구세력이 만든 국가이고 남한은 분단세력이 중심이 되어 만든 국가라고 규정하면서 한반도 통일의 중심은 북한임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둘째, 하나의 조선론 틀에서는 주한미군을 외세로 간주하여 철수를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한반도에서 두 개 국가론을 수용하면 주한미국 철수 주장은 내정간섭이 될 수 있다.
북한이 70년 넘는 세월동안 집요하게 주장하고 관철시키려 했던 하나의 조선론을 포기한 것을 계기로 남과 북은 모두 남북관계의 질적인 전환, 즉 패러다임의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은 하나의 조선론에서 상정해 왔던 상황, 특히 남한에서의 통일전선 사업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남한과의 교류와 협력이 역 통일전선의 위험한 고리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 주한미군도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고 그들을 위협하는 적대적 외세로만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미국이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을 견제하고 한반도에서의 유연한 세력균형을 위한 중립적 우호세력이 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미국 일부 언론이나 학자들도 대 중국 견제를 위해서는 미국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정형화된 질서의 궐위 시대에 접어든 남북한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우선 그동안 남북관계를 규정해 왔던 통념들을 털어내야 한다. 지난 시기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를 그들이 설정한 논리와 정책을 바탕으로 국내외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절해 왔다. 이 과정에 남한이 영향을 미치거나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협소했다.
사실 남과 북 모두 여건만 허락하면 상대방을 자신의 배타적 주권체제 하에 통합시키려하기 때문에 온전한 주권국가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 사이에 평화공존체제가 작동하여 안보상 위협이 일시적으로 감소할 수는 있겠지만, 남북의 정치대결(주권게임)은 온전한 주권국가(통일)가 될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건강한 남북관계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우선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위에서 제기된 남북관계의 본질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북한의 새로운 공세에 일일이 대응하거나 특정한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북한을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랫동안 남북관계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 해왔던 사람들과 시민단체는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이 말하는 무용명제(해보아야 소용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려왔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진전과 퇴행만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12. 3 계엄 이후 우리는 무용해 보였고 좌절했으며 소외된 약자였던 사람들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의 힘을 보았다.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icacy)을 실감한 것이다.
이 현상은 남북관계가 주는 무력감 때문에 좌절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더불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평화와 통일이 함께 갈 수 있는 남북관계는 우선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주와 민주, 평화와 복지가 관철될 때 가능하다. 지금은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만들고, 이것을 하나의 레짐으로 발전시키는 운동을 펼쳐나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