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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제19회 평화나눔센터 정책포럼 언론보도(프레시안)

작성자/Author
관리자
작성일/Date
2017-03-2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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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맑스 후예들도 통일문제에는 실용적"
독일은 "퍼주기" 논란을 어떻게 이겨냈나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물품의 대남 반입액이 최근 처음으로 1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꾸준히 증가하던 남북간의 교역이 개성공단의 정착과 함께 질적 도약을 예고하고 있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020년 남북 경제공동체 구축"을 공언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퍼주기" 논란 역시 가열되고 있는데 주장의 핵심은 역시 남한의 "퍼주기"가 김정일 정권의 생명을 연장해줄 뿐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국회에 제출된 남북협력기금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이같은 시점에서 동서독의 교역이 독일 통일에 미친 영향을 반추해보면서 한반도의 경제 협력과 비교해 보는 강연이 열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22일 저녁 대북 지원 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서 주최한 정책포럼에서 독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FES) 한국사무소의 피터 가이 소장의 강연이다.


피터 가이 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시장·계획경제연구소 조교수를 역임했고 과거 폴크스바겐 재단이 지원하는 "중·동구 유럽경제" 연구 프로젝트의 연구위원을 지낸 학자로 동서독 경제교류를 현장에서 보고 분석한 경험을 갖고 있다.

다음은 이날 피터 가이 소장의 강연 요약.

"서독 정부, 경제적 실리 아닌 정치적 목적 위해 교역"

서독의 입장에서 보면 동서독의 거래는 우선 정치적인 사안이었다. 서독이 동독과 경제관계를 이어나갔던 이유는 동독이 경제적으로 소련의 영향권에 더 깊숙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또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동서독은 전쟁이 없어서 동서독 간의 경계선은 1957년까지 별 의미가 없었다. 1945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1961년까지 동서독의 관계는 밀접했고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비교적 쉽게 건너갈 수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암거래도 활발해 1950년대 암거래는 정상적 거래의 80%에 이르기도 했다.

국경 왕래자는 지금 생각하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동독인들은 공산진영에서 살고 잠을 자다가도 낮에는 자본주의 서독에서 일했다. 국경 왕래자들은 베를린만 20만 명이었고 이들은 전철, 지하철 등을 타고 서독에 가서 하루를 지냈다. 이건 동서독 사람들이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접촉하고 정보를 교환했다는 것을 뜻한다. 서독이 얼마나 잘 사는가를 얘기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

국경왕래 상인도 있었다. 동독인들은 동서독 국경과 인접한 서독 상점에 와서 물품을 구입했다. 그곳의 서독 상점들은 동독 고객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정부 색깔 관계없이 교역량 지속 증가"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동서독간의 교역의 특징은 첫째, 그 어느 시기에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둘째, 교역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물론 1980년대에 와서 동독과의 교역이 서독의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로 감소했다. 동독에서도 대서독 교역이 1950년대 16%에서 1989년 8%로 감소했다. 동독이 공급할 수 있는 상품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고, 동독 제품의 질이 떨어져 서독 기업들이 동독에서 들어오는 물건에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40년간 독일 주변에서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역이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53년 동독 봉기, 1965년 헝가리 봉기, 1968년 체코 침공 같은 동유럽 주민들의 대공산주의 항거와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에도 불구하고 교역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는 동서독 모두 교역을 계속하고자 하는 상당히 강력한 합의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1953년 동독 봉기 이후 동독 정부는 국민들에게 많은 양보를 했고 그중 중요한 조치가 서독 TV를 볼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베를린 장벽을 세우던 당시 서독 정부는 보수 정권이었다. 그 직후 좌우 대연정이 시작됐고 그 다음 중도 좌파, 중도 보수 정권이 이어졌다. 그러나 동서독 교역은 서독 정부가 좌파냐 우파냐와 상관없이 계속 상승했다.

"동독 태도·능력 개의치 않아"

서독 입장에서 동독과의 교역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동서독 관계에서 서독 정부는 상당히 실용적인 노선을 취했는데 서독 역사에서 이 문제만큼 실용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다.

서독 정부는 동서독 교역을 대외 무역으로 보지 않았다. 동서독은 두 개의 국가라는 합의를 갖고 있었지만 서독은 하나의 민족으로 여겼다. 동독과의 교역은 국내 상거래도, 대외 무역도 아닌 특별한 거래로 여겼다. 국제법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관세도 없었다.

동독은 대외무역으로 여겼고 기업간 접촉에서도 항상 대외무역부를 내세웠다. 그러나 서독 정부는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맑스, 헤겔 같은 많은 철학자가 나와 수많은 철학적 개념들을 만들어냈던 독일이지만 동서독 관계에 있어서만은 그런 순수하고 확실한 개념을 적용하지 않고 상당히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동독의 화폐는 태환성이 없어 동독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역에서의 대금 지급 문제가 있었는데 동서독은 청산단위(VE)를 만들어 "1 서독 마르크 = 1 청산단위(VE)=1 동독 마르크"로 계산했다. 암 시장에서 1:4였던 동서독 화폐 가치로 볼 때 이는 구매력이 어떤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굉장히 관대한 조치였다.

동독은 항상 외화가 부족해 서독은 "스윙(SWING)"이라는 무이자 대월을 해줬다. 이 금액은 점차 커져 1976년 8억5000만 청산단위까지 됐다. 이는 서독 납세자들이 동독에 현재 가치로 약 5억 미국 달러 정도를 빌려준 셈이었다. 동독은 이같은 스윙을 평균 약 87% 사용했다.

"서독은 동독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서독이 동독을 돕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동서독은 다른 사회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소속 동맹도 달랐다. 동독인들 기아에 허덕이지도 않았고 물자가 그렇게 부족하지도 않았다. 서독처럼 멋진 소비재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좋은 상품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서독은 왜 그렇게 양보했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동독 지역의 한 가운데 위치한 베를린에서 서부 (서베를린)는 서독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서독의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서베를린으로 왕래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서독의 물자가 동독 루트를 통해 폴란드, 소련 등 동유럽으로 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베를린 장벽이 생겼던 1961년에도 동서독간 거래가 중단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1960년의 베를린 위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위기 때 사람들은 이런 위기가 심각해진다면 결과가 좋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독은 복잡 미묘한 동서독 관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늘 노력했다. 대표적인 것이 1960년 8월의 교역 간소화 협상이었다. 동독은 서독인들이 동베를린을 방문할 때 통행증을 가져야 한다는 제도를 갑자기 도입했다. 그러자 서독은 베를린 협정(동서독간 거래 규정 협정) 취소를 통지해 교역 중단의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서독 정부의 입장에서는 동독이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베를린 가는 길을 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위기 상황은 6개월도 안 돼 다시 과거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 위기가 주었던 교훈은 동서독 교역이 정치적인 사건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50~60년대 유럽의 정치적 기상도는 그야말로 얼음장이었다. 서독은 이같은 시기의 동서독 교역을 관계의 "다리"로 여겼다.

서독에도 있었던 "퍼주기" 논란

1960년대 말 동서독 간에는 "긴장완화정책"이라고 불리던 정책이 시작됐다. 이 정책을 아주 단순화하면 서독이 동독 정부에 돈을 지불하고 정치적 양보를 얻어낸 것이었다.

1970~72년 동서독 관계의 기본 원칙이 확립됐다. 이 원칙의 핵심은 동서독이 서로를 국제법상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개의 국가가 맺을 수 있는 조약을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 서독 입장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이 조약을 통해 해결됐는데 그것은 바로 베를린으로 가는 길을 자유롭게 유지하게 된 것이다. 동독 정부가 서독-서베를린 간 수송의 자유를 보장했고 동서베를린간 전화 통신도 허용했다. 이로써 전화 통신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왕래도 부쩍 증가했다.


동독이 서독과의 관계를 통해 얼마의 이득을 보았는가 계산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서독은 동독과의 거래에서 얼마의 이득을 봤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동독과의 교역이 전체 무역의 2%에 불과해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동서독의 교역과 관련해 남북한간의 문제에서도 거론될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을 하겠다.

첫째, 동서독의 경제교류가 동독 정권을 안정시켰나? 독일에서도 이것이 뜨거운 논란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 일부의 사람들은 서독이 돈을 줘서 동독 정권을 생존시키고 있다고 말했고,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서독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동독 지도층은 왜 긴장완화와 협력 정책에 응했나?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감시 속에 가둬두고 남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동독은 왜 그걸 그냥 놔뒀을까의 문제다.

셋째, 동서독의 거래가 동독 정권을 유지시켰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그렇게 많은 돈을 동독에 줬는데도 동독은 왜 몰락했을까?

여러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보겠다.

첫째, 서독 정부가 동독에 돈을 많이 주긴 했지만 그것이 1600만이 살고 있는 국가를 지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결국 동독 정권의 생존이 아니라 붕괴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많은 동독인들은 서독 뉴스를 접하면서 동서독의 체제를 직접 비교할 수 있었다. 1989년 벌어졌던 동독인들의 수많은 소요 사태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었다. 동독인들은 서독 사람들처럼 자유로운 쇼핑과 여행을 원했다.

둘째, 동독 지도층은 왜 진장완화 정책을 수용했을까. 동독 정부는 1953년 봉기 이후 국민들의 힘을 두려워 했는데 불만이 커지면 또다시 그런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동독 지도층은 긴장완화 정책을 수용해서 나올 모든 것의 끝이 어떤 것일지 잘 알지 못했다. 긴장완화와 협력이 어느 날 어떤 모습으로 귀결될지 몰랐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사람들의 접촉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셋째, 동독의 몰락은 궁극적으로 중앙계획경제가 가진 수많은 약점 때문이었다. 서독이 지불한 그 정도의 돈으로는 절대 연명할 수 없었다. 1980년대 약 40억 달러를 가지고는 인프라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 돈을 가지고 확대재생산을 위한 투자나 농업 개선을 위한 투자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또 동독으로 간 돈 중 많은 부분은 선물을 통해 어차피 소비된 것이지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의 통일을 자기 생에서 겪을 줄은 몰랐다. 이 모든 사건이 얼마나 뜻밖에 빨리 진전됐는지 모두가 놀랐다.



정리=황준호/기자
2005-11-23 오후 2:5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