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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남북의 ‘마음’은 통할 수 있을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1-05 15:30
조회
306
[편집자 주]

2018년 올해로 남과 북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맞이한 분단이 70년 전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하면서 제도적으로 공고화된 셈입니다. 그렇게 70년이 흘러 남과 북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단된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온전할 리는 없을 듯 합니다.  이런 이유로 분단의 극복은 어쩌면 갈라진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되는 방법을 찾아야 가능할 것입니다.  아래 김성경 교수의 글은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소식지 제92호(2017년 송년호)에 실린 글을 홈페이지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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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마음’은 통할 수 있을까?


김성경(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마음,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하는 힘”. 우연히 본 광고 영상의 카피 문구다. 캠페인을 겸한 이 광고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는 좋아하는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밥도 잘 먹고, 책도 열심히 읽는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며 대견스러워한다. 같은 캠페인에 등장한 또 다른 에피소드는 좋은 곳, 맛있는 음식, 근사한 물건을 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을 보여주며, “마음, 인간이 가진 가장 따뜻한 힘”이라는 카피 문구를 넣는다. 이 광고는 “마음”이라는 것이 신기하고 부럽기만 한 로봇의 모습을 오버랩하면서,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 그리고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힘으로 마음을 정의하고 있다. 과연 ‘마음’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는 말인가?

사실 오랫동안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명확한 실체로 설명될 수는 없지만 그것의 존재 자체, 그 힘을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마음이 상한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있다(없다)’, ‘마음이 좋다’, ‘마음이 통한다’, ‘마음이 따뜻하다’ 등등의 표현이 설명해주 듯 ‘마음’은 굳이 정의내리거나 찾으려 하지 않아도 이 사회내 참여자라면 누구든 그 의미와 작동을 이해하고 있다. 그만큼 ‘마음’은 인류 역사 속에서 통용되어 온 것이며,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이해 혹은 교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끈끈한 유대를 구축하게 한다. 그만큼 누군가 함께 조화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공통의 ‘마음’ 혹은 ‘마음’의 긴밀한 연결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서구 철학의 근간이 되어온 이성 중심주의에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만을 주목하면서 그 밖에 존재하는 감정, 감성, (몸)감각, 정동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해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이성 “밖”에 존재해 한동안 담론의 영역에서 비가시화 된 힘들을 복원하려는 사회과학계의 시도는 이성에 기반을 둔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작동에 좀 더 총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함이다. 특히 ‘마음’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비이성을 주목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성과 비이성 그리고 의식과 신체의 경계를 넘어 이 둘의 상호작용과 변증법적 작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김홍중의 개념화를 빌려오면 ‘마음’은 이성, 감정, 의지, 감각 등의 총체로서, 행위를 만들어내는 힘이며 각 사회의 구성원이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실체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개별화된 개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 작동이 가시화된다. ‘마음’의 어원인 ᄆᆞᆷ이 마주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해봤을 때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 구성되는 총체가 바로 ‘마음’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여기’에서 포착되는 ‘마음’은 무엇일까. 과거 민주화시기에 한국사회가 공유했던 “진정성의 마음”이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를 거쳐 “생존주의의 마음”으로 변화했다는 김홍중의 주장은 일견 한국사회의 한 모습을 적확하게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민주화-산업화-신자유주의라는 맥락은 한국사회의 모습을 다소 ‘남한’의 맥락에만 한정해서 분석했다는 비판도 가능해보인다. 사실 식민과 전쟁, 그리고 냉전을 거치면서 ‘남한’은 단 한순간도 ‘북한’이라는 타자와 독립된 개체로 존재해본 적이 없다.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을 굳이 차용하지 않더라도, ‘남한’사회와 이곳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삶은 ‘분단’이라는 맥락과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분단으로 나뉘어져 버린 가족들, 서로간의 체제 경쟁으로 탄생된 남북의 독재정권들, 상대방을 의식하며 발전주의에만 골몰했던 남한과 경제와 정치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만 힘을 기울이는 북한 체제 등 사실 ‘분단’은 남과 북의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일상에 깊이 자리한다. 또한 분단은 단순히 사회 구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만큼 분단이 체화된 몸과 마음은 서로를 적대하게 하고, 이런 상태에서 모두가 존중받는 더 나은 사회나 평화와 자유 등과 같은 인류 이상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다. 분단된 마음은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절름발이로 만들었고, 이런 맥락에서 분단된 마음을 해체하는 것은 단순히 ‘분단’이라는 특정한 정치 체제 극복이 아닌 비정상적으로 작동되어 온 한반도의 모든 이들의 삶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분단된 마음을 극복하려는 것은 지금껏 분단을 문제시한 그 어떤 논의보다도 더 급진적인 시도이며 동시에 분단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한편 북한대학원대학교 남북한마음통합센타에서는 남과 북, 즉 분단 상황에서의 “마음”을 주목하여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지금껏 정치나 경제 중심의 남북관계 혹은 통일담론의 프레임을 “마음적 전환(mindful turn)”을 통해 그 지평을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 “마음적 전환”은 ‘마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의 북한 혹은 분단 관련 담론에 균열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며, ‘마음’을 경유하여 한반도 분단에 새롭게 접근하려는 기획이다. 특히 연구단은 남과 북이 구축한 서로에 대한 마음의 면면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면서, 배제와 혐오를 배태한 분단의 마음을 ‘공감’, ‘연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탐색하고 있다.

예컨대 남과 북은 해방공간 시기를 즈음하여 이념과 체제 경쟁을 본격화하였고, 이후 전쟁과 분단을 겪게 되면서 서로의 반대 항으로 정체성을 구축해왔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맹위를 떨친 반공주의는 북한이라는 타자를 설정하여 구축된 것이며, 이는 정보사회가 도래한 최근까지도 종북이라는 가장 강력한 낙인 담론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북한 또한 반제국주의라는 기치아래 남한을 제국주의에 굴복한 체제로 폄하하며 한반도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으로 주민들을 호도하기도 한다. 다소 거칠게 정리해보면 어쩌면 남과 북은 서로를 ‘적대’함으로써 각자의 체제를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70년이 넘게 계속되어 온 이러한 분단 구조 내에서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용인하며 궁극적으로는 연대할 수 있는 관계를 구성하기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남북 관계의 개선을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시작으로 간헐적이지만,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어온 남북교류는 남북의 적대적 마음에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갑작스레 마주한 남과 북은 상상해온 것과 다소 다른 모습에 당황하기도 하고, 때로는 목소리 높이며 논쟁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던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일방향적인 실천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봤을 때, 북한을 대상으로 한 남한 측의 인도적 지원의 경우에도 단순히 북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멈추지 않고, 남한 사회의 인식과 마음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남북간 경제협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공단은 또 어떠한가. 경제적 의미에서의 손익계산을 넘어서 북한주민과 남한기업인이 직접적으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었으며, 동시에 서로를 안쓰러워하는 중요한 장이었음에 분명하다. 어쩌면 개성공단의 진정한 가치는 남북의 민간인이 서로 ‘접촉’했고, 서로의 입장에 대해 ‘감정이입’을 했으며, 이를 통해 ‘공감’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들은 개성공단의 폐쇄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조치로 실행되고 있는 대북제재의 파고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하는 것은커녕 서로 만날 수조차 없는 현 상황에서 분단된 마음은 더욱더 강화될 위험마저 높다. 특히 북한의 군사적 도발과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되면서, 북한을 향한 남한 주민들의 마음은 더욱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혁명 이후 한국사회에 가득 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에서 ‘북한’과의 화해나 협력의 자리를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분단된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서로에 대한 연민이나 결핍이라는 감각이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북한 주민의 열악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 대부분의 남한주민은 단순히 인류애적 안타까움과는 약간은 결이 다른 마음 아픔과 애처러움, 더 나아가서는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어야 했다는 자책과 부채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서로를 적대해왔지만, 간간이 계속되어 온 교류와 역사 교육 그리고 민족의 감성 등으로 인해 단순히 북한을 적대할 수만은 없다는 미세한 균열이 분단된 마음에도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듯 ‘불편한 마음’은 그만큼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금 남과 북이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시금 남북이 만나서, 서로 마주하며, 싸우고 화해하며 관계를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마주함으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균열이 분단된 마음에 틈새를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2017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이 이토록 적절하게 느껴졌던 해가 있었던가. 대통령 탄핵으로 과거 세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촛불혁명이라는 새로운 힘으로 남한이 온통 들썩거렸으며, 새로운 미래라는 희망을 감히 꿈꿀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한 해였다. 이제 우리가 꿈꾸는 미래, 그리고 우리가 바쁘게 준비해야 하는 2018년에는 적어도 남북 사이의 적대적 마음을 다시금 성찰해볼 수 있는 작은 기회라고 시작되어야 한다. “마음”만 먹으면 안 될 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우리가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말이다.